조국을 배신한 백제의 역적 / 연개소문이 죽은 해는 언제일까 / 단재 신채호 “연개소문은 657년에 사망했다” / 천남생 묘지명 입증 ‘환단고기’의 역사성

성헌식의 대고구리 조국을 배신한 백제의 역적 부여풍에 반발한 흑치상지, 부여융의 회유에 부흥군과 대립하다 성헌식의 대고구리 조국을 배신한 백제의 역적 부여풍에 반발한 흑치상지, 부여융의 회유에 부흥군과 대립하다

송홍식 역사칼럼니스트(코글리 역사저널 편집인) 송홍식 역사칼럼니스트(코글리 역사저널 편집인)

663년 백제와 왜 연합군이 백강구 전투에서 참패하고 부흥군의 중심이었던 임존성과 주유성이 함락됨으로써 백제라는 이름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자신들의 조국 멸망에 지대한 공을 세운 천하의 역적이 있었으니, 단연 최고는 의자왕을 체포하여 당나라 장군 소정방에게 바친 웅진 성주 예식진(禰寔進)일 것이다. 그의 뒤를 잇는 또 다른 만고역적이 있었으니 그는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隆, 615~682)으로 당나라에 귀순해서는 조국 백제의 부흥군을 와해시키는 데 앞장선 장본인이다. 또 다른 배신자는 바로 임존성에 의지하면서 부흥군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흑치상지이다. 660년 7월 백제의 도성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포위되자 의자왕과 태자효는 웅진으로 피신하여 성주 예식진의 배신에 사로잡혀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고 만다. 함께 항복한 부여융은 의자왕이 낙양으로 압송될 때 동행하여 곧 당나라로 귀순하여 창고 등을 관장하는 종3품 사가경(司家卿)의 관직을 부여받는다. 백제왕으로 추대되어 왜에서 귀국한 부여풍이 부흥군의 실권자 부여복신을 죽이는 내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흥군의 공세가 날로 거세지자 당나라 웅진도독은 본국에 지원군을 요청한다. 이에 부여융은 유인궤 등과 군량을 실은 수군을 이끌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는 길에 왜군과 4번을 싸워 모두 이기고 왜선 400척을 불태우는 대승을 거두고 육군과 합류하여 함께 주류성을 공격하였다. 당나라 황제로부터 백제왕으로 책봉된 부여융은 부흥군 장수에게 몰래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유혹하였다. 부여풍은 잔인하고 의심이 많아 자신을 옹립해 준 부여복신을 죽였다. 다른 장수인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법이 있을까. 당은 애초부터 백제의 영토를 갖지 않으려 하였다. 다만 백제가 고구려와 손잡은 것이 미워서 신라와 함께 쳤을 뿐이다. 지금 부여륭은 선왕의 사랑을 받은 아들로, 대세를 잘 알고 있는 데다 당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다. 당나라가 그에게 백제왕의 작위를 주고 대군을 동원해 그를 호위하여 귀국하도록 하니, 백제의 총명한 군사들이여! 짐의 말을 믿고 부여융을 왕으로 받아들인다면 전쟁의 고통 없이 옛 나라를 회복하고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군에 저항한다면 짐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잔인한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했기 때문에 패배하면 대군에게 살육당할 것이고, 승리하면 부여풍의 의심을 사서 복신처럼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이 현명한 자의 선택이 될 수 있겠는가 663년 백제와 왜 연합군이 백강구 전투에서 참패하고 부흥군의 중심이었던 임존성과 주유성이 함락됨으로써 백제라는 이름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자신들의 조국 멸망에 지대한 공을 세운 천하의 역적이 있었으니, 단연 최고는 의자왕을 체포하여 당나라 장군 소정방에게 바친 웅진 성주 예식진(禰寔進)일 것이다. 그의 뒤를 잇는 또 다른 만고역적이 있었으니 그는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隆, 615~682)으로 당나라에 귀순해서는 조국 백제의 부흥군을 와해시키는 데 앞장선 장본인이다. 또 다른 배신자는 바로 임존성에 의지하면서 부흥군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흑치상지이다. 660년 7월 백제의 도성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포위되자 의자왕과 태자효는 웅진으로 피신하여 성주 예식진의 배신에 사로잡혀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고 만다. 함께 항복한 부여융은 의자왕이 낙양으로 압송될 때 동행하여 곧 당나라로 귀순하여 창고 등을 관장하는 종3품 사가경(司家卿)의 관직을 부여받는다. 백제왕으로 추대되어 왜에서 귀국한 부여풍이 부흥군의 실권자 부여복신을 죽이는 내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흥군의 공세가 날로 거세지자 당나라 웅진도독은 본국에 지원군을 요청한다. 이에 부여융은 유인궤 등과 군량을 실은 수군을 이끌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는 길에 왜군과 4번을 싸워 모두 이기고 왜선 400척을 불태우는 대승을 거두고 육군과 합류하여 함께 주류성을 공격하였다. 당나라 황제로부터 백제왕으로 책봉된 부여융은 부흥군 장수에게 몰래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유혹하였다. 부여풍은 잔인하고 의심이 많아 자신을 옹립해 준 부여복신을 죽였다. 다른 장수인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법이 있을까. 당은 애초부터 백제의 영토를 갖지 않으려 하였다. 다만 백제가 고구려와 손잡은 것이 미워서 신라와 함께 쳤을 뿐이다. 지금 부여륭은 선왕의 사랑을 받은 아들로, 대세를 잘 알고 있는 데다 당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다. 당나라가 그에게 백제왕의 작위를 주고 대군을 동원해 그를 호위하여 귀국하도록 하니, 백제의 총명한 군사들이여! 짐의 말을 믿고 부여융을 왕으로 받아들인다면 전쟁의 고통 없이 옛 나라를 회복하고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군에 저항한다면 짐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잔인한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했기 때문에 패배하면 대군에게 살육당할 것이고, 승리하면 부여풍의 의심을 사서 복신처럼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이 현명한 자의 선택이 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본거지였던 임종성을 공격해 함락시킨 배신자 흑치상지 [사진=필자 제공] 자신의 본거지였던 임종성을 공격해 함락시킨 배신자 흑치상지 [사진=필자 제공]

부여융의 서신을 받은 흑치상지는 부여풍이 복신을 죽인 것을 매우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이 관할하던 200성과 함께 부여융에게 투항하여 임존성을 홀로 지키고 있는 지수신에게 서신을 보내 “부여풍은 잔인하여 백제를 중흥할 영웅이 아니다”라고 언급하며 함께 항복하자고 권하였다. 이에 지수신은 “우리가 상좌평복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백제를 부흥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간신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통 아닌가요? 그러나 상좌평이 의병을 제창한 것은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상좌평의 죽음이 비통하다고 해서 그것을 복수하려고 당나라에 투항한다면 이는 상좌평만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백제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만약 상좌평의 영이 계시다면 이로 인한 마음의 고통은 손바닥을 통과하거나 독약을 먹는 것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나는 공이 마음을 바꿔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답했다. 흑치상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나당연합군의 선두에 서서 5만의 병력을 이끌고 주류성을 포위하여 함락시키자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세간에서는 흑치상지의 이러한 역적 행위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동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이에 반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혹평하였다. 아, 백제 중흥의 대업을 부끄럽게 한 자는 상좌평 부여복신을 죽인 부여풍이다. 그는 중흥하는 백제를 멸망시킨 제1의 죄인이었다. 비록 부여풍이 죄인이긴 하지만 흑치상지는 부여풍이 나쁘다는 이유로 조국을 배신하고 당나라의 노예가 되었으므로 백제를 멸망시킨 제2의 죄인이다. 종래의 역사서에서는 단순히 『당서』의 평가에 따라 흑치상지를 찬미하였으니, 이처럼 미친 자들의 붓장난이 아니겠는가.” 백제 부흥이 완전히 종식된 후 흑치상지는 부여융과 함께 당에 들어가 충성을 맹세하였다. 664년 부여융이 웅진도독에 임명되어 백제 땅에 올 때 흑치상지도 다른 백제인들과 함께 돌아와 웅진도독부(웅진)의 군장이 되었다. 훗날 웅진도독부가 신라군의 공격으로 소멸되자 흑치상지는 당나라로 돌아와 토번(토번, 티베트)과 돌궐(돌厥)을 치는 데 큰 무공을 세워 이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훗날 정2품 상주국의 벼슬에까지 오른다. 이처럼 부여융은 조국 백제를 멸망시킨 당에 착수하여 조국의 부흥을 저지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백강 전투에서 당군이 대승을 거두는 데 수훈을 세우고 백제 복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흑치상지를 회유하여 전향시킴으로써 백제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 만고의 역적이다. 현재 부여시는 이러한 부여융의 가묘를 만들어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있다. 부여융의 서신을 받은 흑치상지는 부여풍이 복신을 죽인 것을 매우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이 관할하던 200성과 함께 부여융에게 투항하여 임존성을 홀로 지키고 있는 지수신에게 서신을 보내 “부여풍은 잔인하여 백제를 중흥할 영웅이 아니다”라고 언급하며 함께 항복하자고 권하였다. 이에 지수신은 “우리가 상좌평복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백제를 부흥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간신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통 아닌가요? 그러나 상좌평이 의병을 제창한 것은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상좌평의 죽음이 비통하다고 해서 그것을 복수하려고 당나라에 투항한다면 이는 상좌평만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백제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만약 상좌평의 영이 계시다면 이로 인한 마음의 고통은 손바닥을 통과하거나 독약을 먹는 것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나는 공이 마음을 바꿔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답했다. 흑치상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나당연합군의 선두에 서서 5만의 병력을 이끌고 주류성을 포위하여 함락시키자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세간에서는 흑치상지의 이러한 역적 행위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동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이에 반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혹평하였다. 아, 백제 중흥의 대업을 부끄럽게 한 자는 상좌평 부여복신을 죽인 부여풍이다. 그는 중흥하는 백제를 멸망시킨 제1의 죄인이었다. 비록 부여풍이 죄인이긴 하지만 흑치상지는 부여풍이 나쁘다는 이유로 조국을 배신하고 당나라의 노예가 되었으므로 백제를 멸망시킨 제2의 죄인이다. 종래의 역사서에서는 단순히 『당서』의 평가에 따라 흑치상지를 찬미하였으니, 이처럼 미친 자들의 붓장난이 아니겠는가.” 백제 부흥이 완전히 종식된 후 흑치상지는 부여융과 함께 당에 들어가 충성을 맹세하였다. 664년 부여융이 웅진도독에 임명되어 백제 땅에 올 때 흑치상지도 다른 백제인들과 함께 돌아와 웅진도독부(웅진)의 군장이 되었다. 훗날 웅진도독부가 신라군의 공격으로 소멸되자 흑치상지는 당나라로 돌아와 토번(토번, 티베트)과 돌궐(돌厥)을 치는 데 큰 무공을 세워 이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훗날 정2품 상주국의 벼슬에까지 오른다. 이처럼 부여융은 조국 백제를 멸망시킨 당에 착수하여 조국의 부흥을 저지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백강 전투에서 당군이 대승을 거두는 데 수훈을 세우고 백제 복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흑치상지를 회유하여 전향시킴으로써 백제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 만고의 역적이다. 현재 부여시는 이러한 부여융의 가묘를 만들어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있다.

부여시 조국을 배신한 만고역적 부여융의 가묘[사진=필자 제공] 부여시 조국을 배신한 만고역적 부여융의 가묘[사진=필자 제공]

 

성헌식の大高九里淵盖蘇文 が死んだ年 はいつだ年 ろうか、年 は年三国, 『삼국사기』に は666년, 『태백일사(太白一史)』<657년 と기서 れている 성헌식<大高九里淵開蘇文>が死ん年 はいつ연년, 『삼국사기(三國史記)』『태백일사(太白一史)』166년, 『태백일사(太白一史)』657년(太白一史)』657년, 『태백일사(太白

송홍식 역사칼럼니스트(코글리 역사저널 편집인) 송홍식 역사칼럼니스트(코글리 역사저널 편집인)

 

KBS 역사드라마 ‘대조영’에서 연개소문 죽음의 장면 [사진=필자 제공] KBS 역사드라마 ‘대조영’에서 연개소문 죽음의 장면 [사진=필자 제공]

『삼국사기』에 따르면 보장왕 25년(666년)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장남 연남생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막안감이 되었다. 처음 정사를 지내고 여러 성을 순시하면서 두 아우 연남건(男南建)과 연남산(男南山)에게 조정에 남아 뒷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어떤 자가 두 동생에게 “막히는 두 사람이 자기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 두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계책을 세워 먼저 꾀하는 게 좋아요라고 해도 처음에는 두 동생이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연남생에게 “남곤과 남산은 자신들의 권세를 빼앗길까 두려워 형을 조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하자 연남생은 자신의 심복을 몰래 평양성으로 보내 두 동생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남건과 남산은 이를 알고 연남생의 심복을 체포하였고, 곧 왕명을 내려 연남생을 소환하자 연남생은 무서워서 감히 돌아오지 못했다. 연남건은 친히 막리로 올라가 군사를 출동시켜 국내성에 살고 있던 연남생을 체포하려 하였다. 남생은 아들 헌성(憲聖)을 당나라에 보내 구원을 애원하였다. 6월에 당 고종이 계필 하력에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그를 맞이하게 하자,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8월 보장왕이 연남건을 막안으로 하여 내외 군사에 대한 직무를 겸직하도록 하였고, 9월 당 고종은 연남생을 특진 요동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로 하여 현도군공으로 책봉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보장왕 25년(666년)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장남 연남생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막안감이 되었다. 처음 정사를 지내고 여러 성을 순시하면서 두 아우 연남건(男南建)과 연남산(男南山)에게 조정에 남아 뒷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어떤 자가 두 동생에게 “막히는 두 사람이 자기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 두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계책을 세워 먼저 꾀하는 게 좋아요라고 해도 처음에는 두 동생이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연남생에게 “남곤과 남산은 자신들의 권세를 빼앗길까 두려워 형을 조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하자 연남생은 자신의 심복을 몰래 평양성으로 보내 두 동생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남건과 남산은 이를 알고 연남생의 심복을 체포하였고, 곧 왕명을 내려 연남생을 소환하자 연남생은 무서워서 감히 돌아오지 못했다. 연남건은 친히 막리로 올라가 군사를 출동시켜 국내성에 살고 있던 연남생을 체포하려 하였다. 남생은 아들 헌성(憲聖)을 당나라에 보내 구원을 애원하였다. 6월에 당 고종이 계필 하력에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그를 맞이하게 하자,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8월 보장왕이 연남건을 막안으로 하여 내외 군사에 대한 직무를 겸직하도록 하였고, 9월 당 고종은 연남생을 특진 요동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로 하여 현도군공으로 책봉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KBS 역사드라마 ‘대조영’에서 연남생 모녀가 곧바로 계필하력에 투항하는 장면 [사진=필자 제공] KBS 역사드라마 ‘대조영’에서 연남생 모녀가 곧바로 계필하력에 투항하는 장면 [사진=필자 제공]

그런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막리지(연개소문)는 임종 때 남생과 남산을 둘러보며 너희 형제는 서로 사랑하기를 물처럼 했다. 화살을 맞추면 강해지고, 이것을 나누면 바로 부러진다. 이제 이 죽으려는 아버지의 말씀을 반드시 잊지 말고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때는 곧 개화 16년(657년) 10월 7일이다. 무덤은 구름산의 구봉산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개화는 고구려 보장제의 연호이며, 개화 16년은 서기 657년으로 『자치통감』 등 중국 기록을 인용한 『삼국사기』의 666년(보장왕 25년)과는 9년 차이가 난다. 과연 어느 기록이 맞을까. 송홍식 역사칼럼니스트(고구리 역사저널 편집인) 입력 2019-02-09 9:18:00 그런데 태백일사 고구려 국본기에는 막리지(연개소문)는 임종 때 남생과 남산을 둘러보며 너희 형제는 서로 사랑하기를 물처럼 했다. 화살을 맞추면 강해지고, 이것을 나누면 바로 부러진다. 이제 이 죽으려는 아버지의 말씀을 반드시 잊지 말고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때는 곧 개화 16년(657년) 10월 7일이다. 무덤은 구름산의 구봉산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개화는 고구려 보장제의 연호이며, 개화 16년은 서기 657년으로 『자치통감』 등 중국 기록을 인용한 『삼국사기』의 666년(보장왕 25년)과는 9년 차이가 난다. 과연 어느 기록이 맞을까. 송홍식 역사칼럼니스트(고구리 역사저널 편집인) 입력2019-02-099: 18:00

송홍식의 대고구리 단재 신채호 “연개소문은 657년에 사망했다” 657년 연개소문 사후 장남 연남생이 막을 내리고 지위 계승 송홍식의 대고구리 단재 신채호 “연개소문은 657년에 사망했다” 657년 연개소문 사후 장남 연남생이 막을 내리고 지위 계승

송홍식 역사칼럼니스트(코글리 역사저널 편집인) 송홍식 역사칼럼니스트(코글리 역사저널 편집인)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에는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백제가 망한 뒤인 보장왕 25년(666년)으로 기록한 반면 민족의 성경인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는 657년으로 적혀 있어 9년 차이가 난다. 과연 어느 기록이 맞을까. 혹자는 연개소문이 죽은 해가 뭐길래 그렇게 중요하냐고 반문하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역사를 밝히는 데 이 문제는 중요한 역사의 키워드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찾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하나 있는데, 바로 1927년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에서 발견된 ‘천남생묘지명’이다. 원래 성명 연남생은 연개소문의 장자로 형제간에 골육상쟁이 일어난 후 조국 고구려 멸망에 앞장선 만고의 역적이다. 묘지명에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남생이 당나라 조정에서 받은 관직은 정3품인 우위대장군 겸 황실경호군의 검교, 종2품인 상주국, 작위는 백작격인 변국공、國公, 추증된 관직이 병주대도독이다. 당시 당 최고의 대장군이었던 이정과 이정에 버금가는 등급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치면 장관급을 뛰어넘는 부총리급이다. 성씨는 천(千)이고 이름은 남생(南生)이며 자는 원덕(元德)으로 요동군 평양성 출신이다. 원래 성씨는 지연씨였으나 당나라의 고 이연씨 이름을 피해 비슷한 뜻의 샘 정씨로 바꿨다. 증조부는 자유(子遊)이고, 조부는 태조로 다막리를 역임하였으며, 아버지는 개금(개=연개소문)은 태대로였는데, 조부와 아버지가 쇠를 잘 잡고 활을 잘 쏘며 군권을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쥐었다. 나이 9세에 선인의 지위가 부여되어 낭(郞)에 임용되었으며, 15세에 중리 소형에, 18세에 중리 대형에, 23세에 중리 위두 대형에 임용되어 24세의 나이로 장군직을 겸하였다. 28세에 막리지에 임용되어 삼군대장군을 겸하다가 32세 때 태막리지를 더해 군국을 총괄하는 아형원수(阿衡元帥)가 되어 선조의 유업을 잇자 위독한 나라의 권력을 쥐고 사람들의 논란이 없었다. 679년 정월 29일 병으로 안동부에서 죽으니 46세였다.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에는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백제가 망한 뒤인 보장왕 25년(666년)으로 기록한 반면 민족의 성경인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는 657년으로 적혀 있어 9년 차이가 난다. 과연 어느 기록이 맞을까. 혹자는 연개소문이 죽은 해가 뭐길래 그렇게 중요하냐고 반문하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역사를 밝히는 데 이 문제는 중요한 역사의 키워드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찾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하나 있는데, 바로 1927년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에서 발견된 ‘천남생묘지명’이다. 원래 성명 연남생은 연개소문의 장자로 형제간에 골육상쟁이 일어난 후 조국 고구려 멸망에 앞장선 만고의 역적이다. 묘지명에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남생이 당나라 조정에서 받은 관직은 정3품인 우위대장군 겸 황실경호군의 검교, 종2품인 상주국, 작위는 백작격인 변국공、國公, 추증된 관직이 병주대도독이다. 당시 당 최고의 대장군이었던 이정과 이정에 버금가는 등급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치면 장관급을 뛰어넘는 부총리급이다. 성씨는 천(千)이고 이름은 남생(南生)이며 자는 원덕(元德)으로 요동군 평양성 출신이다. 원래 성씨는 지연씨였으나 당나라의 고 이연씨 이름을 피해 비슷한 뜻의 샘 정씨로 바꿨다. 증조부는 자유(子遊)이고, 조부는 태조로 다막리를 역임하였으며, 아버지는 개금(개=연개소문)은 태대로였는데, 조부와 아버지가 쇠를 잘 잡고 활을 잘 쏘며 군권을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쥐었다. 나이 9세에 선인의 지위가 부여되어 낭(郞)에 임용되었으며, 15세에 중리 소형에, 18세에 중리 대형에, 23세에 중리 위두 대형에 임용되어 24세의 나이로 장군직을 겸하였다. 28세에 막리지에 임용되어 삼군대장군을 겸하다가 32세 때 태막리지를 더해 군국을 총괄하는 아형원수(阿衡元帥)가 되어 선조의 유업을 잇자 위독한 나라의 권력을 쥐고 사람들의 논란이 없었다. 679년 정월 29일 병으로 안동부에서 죽으니 46세였다.

천남생묘지 연개소문 이름[사진=필자 제공] 천남생묘지 연개소문 이름[사진=필자 제공]

 

낙양 북망산에 묻혀 있는 민족반역자 천남생 일가. 아들 헌성·남생·증손비 [사진=필자 제공] 낙양 북망산에 묻혀 있는 민족반역자 천남생 일가. 아들 헌성·남생·증손비 [사진=필자 제공]

 

송홍식의 대고구리 천남생묘지명이 입증한 ‘황당고기’의 역사성 ‘황당고기’에 언급된 기록, 일부 사료를 통해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송홍식의 대고구리 천남생묘지명이 입증한 ‘황당고기’의 역사성 ‘황당고기’에 언급된 기록, 일부 사료를 통해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송홍식 역사칼럼니스트(코글리 역사저널 편집인) 송홍식 역사칼럼니스트(코글리 역사저널 편집인)

일제 식민사학의 맥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고담사학계는 자신들의 역사이론과 확연히 다르다는 이유로 황당고기를 위서로 다루고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쓰인 책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검증되지 않아 역사책으로 보기에는 논리성이 결여돼 있고 비합리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황당고기’가 그만큼 무섭다는 것이다. 고단샤학계는 ‘황당고기’를 신봉하는 추종자들을 일명 ‘황파’라고 부르며 국수주의자 또는 사이비역사학 등으로 매도하고 있다. 논리도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역사야말로 오히려 한국사를 심하게 왜곡시키는 행위라고 비판하는데 과연 그럴까. 1976년 이유리에 의해 처음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황당고기」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저술된 책이 아니라, 조선왕조 시대부터 금서로 수서령이 내려져 민간에서 비장되어 전해온 삼성기전, 단군세기, 북부 이곳, 태백일사 등을 하나로 합본하여 출간된 책이다. 이 책들에는 조선왕조와 중국과 일제에 의해 지워진 우리 민족의 상고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담사학계에서 위서라는 ‘환단고기’에 쓰인 역사가 과연 위사인지에 대해 살펴본다. 1. ‘단군세기’에 ’13초월 단군무진 50년(기원전 1733년)에 오성이 취루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오성루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거의 일직선으로 늘어선 현상으로 약 250~300년 만에 나타나는데, 이를 우연히 보고 기록한 확률은 0.7%에 불과하다고 한다. 박찬범 전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기원전 1734년 7월 13일 오후 5시 30분경에 실제로 그런 현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1년 차이가 나므로 그 현상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단군조선 때는 음력 10월을 초월로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므로 실제 같은 해이다. 일제 식민사학의 맥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고담사학계는 자신들의 역사이론과 확연히 다르다는 이유로 황당고기를 위서로 다루고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쓰인 책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검증되지 않아 역사책으로 보기에는 논리성이 결여돼 있고 비합리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황당고기’가 그만큼 무섭다는 것이다. 고단샤학계는 ‘황당고기’를 신봉하는 추종자들을 일명 ‘황파’라고 부르며 국수주의자 또는 사이비역사학 등으로 매도하고 있다. 논리도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역사야말로 오히려 한국사를 심하게 왜곡시키는 행위라고 비판하는데 과연 그럴까. 1976년 이유리에 의해 처음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황당고기」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저술된 책이 아니라, 조선왕조 시대부터 금서로 수서령이 내려져 민간에서 비장되어 전해온 삼성기전, 단군세기, 북부 이곳, 태백일사 등을 하나로 합본하여 출간된 책이다. 이 책들에는 조선왕조와 중국과 일제에 의해 지워진 우리 민족의 상고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담사학계에서 위서라는 ‘환단고기’에 쓰인 역사가 과연 위사인지에 대해 살펴본다. 1. ‘단군세기’에 ’13초월 단군무진 50년(기원전 1733년)에 오성이 취루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오성루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거의 일직선으로 늘어선 현상으로 약 250~300년 만에 나타나는데, 이를 우연히 보고 기록한 확률은 0.7%에 불과하다고 한다. 박찬범 전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기원전 1734년 7월 13일 오후 5시 30분경에 실제로 그런 현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1년 차이가 나므로 그 현상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단군조선 때는 음력 10월을 초월로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므로 실제 같은 해이다.

천지에 오성취루 재현 모습 [사진=필자 제공] 천지에 오성취루 재현 모습 [사진=필자 제공]

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새긴건흥오년명문[사진=필자제공] 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새긴건흥오년명문[사진=필자제공]

2.”태백 한사-고구려국 본기”에 “장수 홍제·호랑이 태렬 황제는 건흥으로 연호를 바꾼 “라는 문구가 있지만”삼국 사기”에는 고구려의 왕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어 황당한 기록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1915년 충청 북도 충주시로 숨김 면에서 발견된 금동 석가 삼존 불상 광배에 “건흥 오백년 세상 사이 병진”이라는 명문이 새겨졌으며 역사적 사실임이 밝혀졌다.3. 광개토 토라타 왕 비문에 “17세 손 크니 츠나 카미 광개토 경 평안 토라타 왕에 이르고 18세가 되는 영락 태왕으로 불렀다(遝지 십칠세 손자 국罡, 히지카타, 평안 호태, 악태 왕)”라는 문구가 있지만”삼국 사기”에 토라타 왕은 19대 임금인 혈통이 13세 손이기 때문에 비문과 일치하지 않는다.한편”판당고기-북부 여자기”에 따르면 시조 해모수는 고주 꿈의 고조부에서로 모스->거진->?-> 불리는->고주몽(고·주몽)에서 혈통이 이어졌다고 기록되고 있다.그러므로”삼국 사기”의 13세에 북부 여기 4세를 맞추려고 비문의 17세의 손자와 일치한다.게다가 광개토 경 호태 렬제이 영락라는 연호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어”판당고기”가 정말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4.”환 장단 옛 기록”에는 고구려와 타이싱국 왕들이 황제를 칭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개토 대제의 영락과 장수 황제의 건흥이 유물의 출토로 확인됐으며 타이싱국 14명의 황제들의 독자 연호가 기록되었으나, 이는 “신당서 “에 기록된 9왕의 사용 연호와 정확히 일치한다.1949년 중국 지린 성돈화에서 발견된 사다에 공주 묘비와 1980년에 꽃 용의 현에서 발견된 정효 공주 묘 비명에 “대흥 호레키 효감 성 법 대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졌으며 4대째 문 황제( 대흠무)의 연호가 “대흥”임이 분명히 입증됐다.

<신당서> 내용과 일치하는 대진국 황제명 [사진=필자 제공] <신당서> 내용과 일치하는 대진국 황제명 [사진=필자 제공]

5.”태백 한사-고구려국 본기”에 “아사요기”에서 요코 다이로 부치는 뚜껑 소문는 일명 개금으로 알려졌다.성은 영이라 그의 선조는 펑청은 사람들로, 아버지는 태조(태조)겠다고 할아버지는 그와 말, 증조부는 광(히로)와 해서 나란히 막리가 됐다.홍무 14년(603)5월 10일에 태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삼국 사기”에는 “개화 조문(개소금)은 성이 천 씨이다.직접 물 속에서 태어났다”라며 사람들을 현혹했다.얼굴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고 의기가 호방했다.아버지의 동부, 서부)의 대대가 사망하면 부분 글이 당연히 지위를 계승해야 했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인품이 잔인하고 포악하고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지 못 했다”로 기록됐고, 상기의 기록이 맞는지 확인하기 어렵다.그런데 1927년에 낙양의 북쪽 노조미 산에서 발견된 “천남생 묘지 이름”에 “성씨는 천에서 이름은 남 학생이고, 자는 원덕으로 요동군 평양 성 출신이다.증조부는 자유인 할아버지는 태조(태조)에서 다막부의 관리를 역임하고 아버지의 개화적 뚜껑=개봉 코토)은 굵은 대로였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쇠를 잘 조종하는 활을 잘 쏘고 군권을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좌지우지했던 “라고 새겨졌고 위의 “태백 한사-고구려국 본기”기록이 참임을 입증했다.참고로, 천남생 아들·헌성(헌성)의 무덤 잡지명에는 “군의 이름은 헌성인, 글씨도 헌성이다.그 조상은 고구려인이다.(중략)증조부 타이조는 본국에서 막 이지에 임용되어 병권을 장악하고 기세가 삼한을 제압하는 명성은 5부 총수가 됐다.할아버지의 개화적 개=뚜껑 소문)은 본국에서 굵은 대로에 임용된 병권을 장악하고 아버지가 이어 아들이 계승하고 권력을 쥐고 총애를 받은 게 눈에 띄었다

1927년 낙양에서 발견된 천남생 묘지명[사진=필자 제공] 1927년 낙양에서 발견된 천남생 묘지명[사진=필자 제공]